Kirlian Camera “Radio Signals for the Dying”

Kirlian Camera만큼 커리어 내내 탐미적인 스타일을 유지해 온 일렉트로닉 밴드는 매우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말이 드물다지 이 밴드가 1979년부터 시작된 장르의 개척자 중 하나임을 생각하면 이만큼 일관된 커리어는 사실 유일하다고 해도 괜찮겠거니 싶다. 덕분에 Kirlian Camera에 대한 씬에서의 존중은 생각보다 더 높은 것처럼 보인다. Abbath와 The True Endless 등에서 베이스를 잡았던 Mia Wallace가 이 ‘팝’ 밴드에 세션으로 합류한 건 그런 의미에서 보여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긴 이 분이 합류한 것도 2018년이니 이젠 그리 신기할 얘기도 아니다.

3년만의 신작은 더블 앨범으로 나왔는데, 밴드가 늘 그랬듯 탐미적인 류의 다크-팝 스타일이지만 그 범위 안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은 꽤 다채롭다. 앨범마다 꼭 하나 이상은 등장하던 사이키한 앰비언트풍의 ‘Genocide Litanies’나, 몽환적이지만 무척이나 팝적인 ‘The Great Unknown’, 밴드의 어두운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Il Tempo Profondo’, 네오클래시컬 튠이 돋보이는(덕분에 잠깐 Ataraxia 생각도 나는) ‘Madre Nera’ 등은 사실 밴드의 다른 앨범에 수록되었다고 하더라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의 곡들이지만, 이 앨범에서 서로 잘 어울려 나름의 분위기를 이뤄낸다. Elena Fossi의 적당히 관능적인 보컬이 더해지면 이제 음악은 고쓰의 경계까지 넘본다. 사실 이런 건 모두 40년 넘게 밴드가 보여준 모습이기는 하지만 Depeche Mode의 ‘Wrong’ 커버에 이르면 이 스타일이 아직도 충분히 세련되게 들린다는 점도 더욱 명확해진다.

700장 한정 아트북에는 보너스 한 장이 더 들어가 있다는데 한 장 또 사야 하나…

[Dependent, 2024]

Spell “Seasons in the Sun”

Depeche Mode나 New Order 같은 이름들 덕분에 많은 이미지 순화가 이뤄져서 그렇지 Mute Records의 초창기 카탈로그를 보자면 이 레이블이 그 시절 어디 가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똘끼 넘치는… 레이블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초창기의 이름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이름들 중 하나라면 역시 Boyd Rice일 텐데, 무려 Stumm 4번으로 Depeche Mode의 데뷔작보다도 먼저 나온데다… NON의 이름으로 나온 Boyd Rice의 앨범들의 수를 생각해 보면 Boyd Rice를 레이블의 가장 중요한 뮤지션들 중 하나라고 해도 많이 과장은 아닐 것이다. 논란거리로는 업계 최고봉일 인물인만큼 레이블로서는 용감하기 그지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80년대 초반이니까 가능했을 선택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 시절이라고 Boyd Rice가 정상인이었을 리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Spell은 그나마 Mute에서 Boyd Rice가 내놓은 앨범들 중에서는 가장 ‘순한맛’에 가까울 프로젝트이다. 그래도 차트의 상단에 이름을 내밀던 메이저 팝 듀오의 멤버에서 네오포크를 대표하는 여성 뮤지션 중 하나로 변신한 Rose McDowall과 함께 만든 커버곡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싼티를 완전히 감추지 못한 드럼머신과 신서사이저 위에 Rose의 예의 그 ‘ethereal’한 보컬을 얹은 스타일로 꽤 ‘스푸키’한 내용들을 담은 러브송들을 풀어냈으니 이 둘이 함께 만든 음악으로서는 이만큼 안전한 선택도 없을지도? 하지만 Jacque Brel의 원곡인 ‘Seasons in the Sun’을 극우전사 Boyd Rice가 연주하는 아이러니함이 매력적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Dolly Parton의 곡인 ‘Down from Dover’도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선택일 것이다.

그래도 ‘Rosemary’s Baby(Lullaby Part 1)’나 ‘Stone is Very Very Cold’ 같은 곡은 이 듀엣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스타일이라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애초에 러브송을 만질 사람들이 아닌데 굳이 러브송을 만진 나머지 제일 좋은 곡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본격 러브송과 거리가 있는 곡들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쓰고 보니 이게 칭찬인가…

[Mute, 1993]

John Sykes “Loveland”

John Sykes를 좋아하냐면 꽤나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고 화끈함으로는 당대의 다른 연주자들 중에서도 손꼽힐 명인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이 분이 참여했던 앨범들 중에 본격 헤비메탈 앨범은 사실 별로 없다. 그렇지만 이 분에 대한 이미지는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불끈불끈 힘이 넘치는 철의 기타리스트…인 양 묘사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보인다. 아무래도 Sykes가 Whitesnake나 Blue Murder, 또는 Thin Lizzy의 “Thunder and Lightning”를 통해 이름을 날린 바 많으니 그럴 것이다. 말하자면 John Sykes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름 멜로우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 연주자라는 것이다. 노래까지 하다가 앨범을 망치곤 하는 몇몇 반면교사와는 달리 노래도 꽤 잘 하시는 분이기도 하고.

그런 John Sykes의 멜로우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앨범은 이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레이블에서 일본시장용 발라드 모음집 하나 만들자고 했던 게 정규앨범으로 나온 거기도 하고, 어찌 생각하면 기타 잘 치고 노래도 잘 하고 얼굴도 이만하면 잘생겼고… 한 John Sykes인 만큼 발라드 모음집 내기는 딱이다 싶기도 하다. 문제는 화끈한 플레이로 유명한 분인 만큼 앨범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레이블의 기대와는 딴판이었고, 덕분에 나처럼 일본반이라면 돈 걱정부터 앞서는 사람도 1997년 이후 재발매 한 번 된 적 없는 이 앨범을 저럼하게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뮤지션 입장에서는 꽤나 곤란할 것이다.

발라드 모음집인 만큼 화끈한 면모는 찾아볼 수 없고, 딱히 두드러지는 곡도 없는 편이긴 하지만 어쨌든 특유의 비브라토도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Beatles풍의 ‘Wuthering Heights’나 Phil Lynott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Dont Hurt me This Way’ 블루지함 등 이 영국인 기타리스트의 현재를 이룬 다양한 모습들을 두루 확인할 수 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하드록 한 곡만 제대로 넣어놨어도 아마 앨범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하긴 나부터도 듣다 보면 답답함이 없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느낌은 케니지 솔로 앨범에서 느껴봤던 것 같기도 하다.

[Mercury, 1997]

Various “Abbey Road Reimagined : A Tribute to the Beatles”

Cleopatra의 야심작? 뭐 트리뷰트야 원래부터 많이 내는 레이블이고 Beatles 트리뷰트라면 신선할 것 하나 없는 흔해빠진 기획이지만 앨범에 참여한 라인업을 보면 생각보다 많이 의외다. 하긴 이 Reimagined 시리즈의 경우에는 Cleopatra가 꼭 트리뷰트에 끼워넣던 Electric Hellfire Club 등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긴 했는데…. 다들 물론 전성기 한참 지난 이름들이긴 하다만 Cleopatra가 어떻게 구워삶았을까 하는 이름들로 가득한 참여 뮤지션들을 보면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월마트에서도 이 앨범을 팔고 있는 걸 보면 아마도 대개는 나와 비슷한 생각들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앨범이 이 정도로 아무 얘깃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의 한 절반은 Cleopatra가 그동안 쌓아온 악업… 때문일 것이다. 각설하고.

앨범의 가장 잘 알려진 곡일 ‘Come Together’는 Snowy White와 Durga McBroom의 Pink Floyd 세션 조합으로 꽤 무난한 진행을 보여주고, Ron Thal의 ‘Here Comes the Sun’도 좀 더 헤비하고 묵직하게 곡을 풀어 나가는 모습이 흥미로운데, 참여 뮤지션부터 확 튀던 Steve Stevens와 Arthur Brown의 ‘I Want You(She’s so Heavy)’의 커버나, Graham Bonnet과 Rick Wakeman의 ‘You Never Give Your Money’는 내게는 아무래도 좀 많이 그렇다. 둘 다 보컬이 보컬인지라 원곡과 상관없이 자신의 스타일을 밀고 나가는데, 특히나 애드립이 좀 과해 보이는(과하다 못해 자신만의 멜로디를 찾아나서는) Bonnet의 보컬이 곡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말하자면 수록곡들의 편차가 좀 심해 보이는데, 하긴 꼭 Cleopatra여서가 아니라 나름 모험적인 시도를 선보이는 트리뷰트 앨범들이 이런 결과를 피해가기는 쉽지 않겠다. Beatles니까 오리지널이 워낙에 굳게 자리잡고 있는 탓도 있겠다.

그래도 Rebecca Pidgeon과 Patrick Moraz가 참여한 ‘Because’ 처럼 생각지 못한 접근을 보여주는 곡도 있다. 개인적으로 Rebecca를 꽤 위악적인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Patrick Moraz의 묵직한 연주에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곡을 풀어내는 모습은 좀 많이 의외였다. 아마도 이런 곡들 때문에 트리뷰트 앨범을 찾아듣는 것일 것이다.

[Cleopatra, 2023]

Marillion “This Strange Engine”

교회는 딱히 안 다니지만 부활절이라니까 간만에 “Seasons End”를 들으려는데 이상하게 안 보이기도 하고 어쨌든 나는 “Seasons End”보다 이 앨범을 더 좋아하므로 꽤 그럴듯한 선택이라고 강변해 본다. Marillion의 많은 앨범들 간에 정도의 차이야 있지만 모든 앨범을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별로 인기는 없어 보이지만 개인적으로 꽤 자주 듣는 한 장을 고른다면 이 앨범이다. 일단 Marillion의 몇 안 되는 라이센스작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 앨범을 절하하는 목소리들은 이게 팝이지 뭐가 프로그냐 하는 편인데, 솔직히 Steve Hogarth가 마이크를 잡은 이후 Marillion이 팝적이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Kayleigh’ 같은 곡을 너무 팝적이라고 하는 이들을 볼 수 없는 것에 비춰 보면 조금은 불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 왜 이런 결과가 나왔으려나? 짐작으로는 복잡한 구성과 Genesis에서 이어받았을 연극적인 분위기를 보고 싶어하는 게 보통의 프로그 팬들의 기대라면 그 보다는 좀 더 정적이고 어쿠스틱한 사운드를 보여주는 앨범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15분짜리 ‘This Strange Engine’의 극적인 면모도 그렇고, 앨범 시작부터 Hogarth 시대 Marillion이 어디까지 화려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Man of a Thousand Faces'(물론 조지프 캠벨의 그 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도 그렇고, 밴드 최고의 발라드 중 하나일 ‘Estonia’도 앨범의 가치를 높여준다. 어쨌든 ‘모던’보다는 클래식 록에 더 가까워 보였던 밴드가 훗날의 좀 더 모던해지는 사운드의 단초를 보여주기 시작한 앨범이기도 하다. 모던로크척결을 외치던 어느 메탈바보 고등학생에게는 어쩌면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잘 보이지 않았던 세상을 다시 보여준 앨범일지도 모르겠다.

[Intact, 1997]